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신 바빌론 제국의 수도를 아름답게 꾸미던 전설적인 정원으로, 느부갓네살 2세가 조성하였다. 공중 정원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역사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존재했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고대 기록의 내용이 사실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일부 학자들은 공중 정원이 실제로는 바빌론에 있던 것이 아니라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전히 공중 정원이 고대 시대에 대한 상상 속에서 지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공중 정원의 존재는 바빌론과 관련한 고고학으로 입증되거나 고대 바빌론의 문헌들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대 작가들은 느부갓네살 대왕 시기에 공중 정원이 수도에 있었으며, 헬레니즘 시대까지 존재했었다고 설명한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더 익숙한 그리스의 건축물과 비교했을 때, 정원의 이국적인 특성, 위치, 소멸을 둘러싼 미스테리 덕분에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7대 불가사의 중 가장 매혹적인 곳이 되었다.
바빌론과 느부갓네살 2세
바빌론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남쪽으로 부터 8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기원전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주지의 역사를 가진 고대 도시였다. 역사 상 바빌론이 가장 위대했던 시기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으며, 느부갓네살 2세가 통치했던 기원전 6세기 였다. 신 바빌로니아는 느부갓네살 2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재위 B.C. 625-605년)가 아시리아 제국에 승리를 거둔 후 건국되었다. 느부갓네살 2세는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 함락을 포함해 더욱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느부갓네살 2세는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거대한 탑과 실제 동물과 상상의 동물이 타일에 표현된 이슈타르의 문이 기원전 575년에 세워졌다. 아마 이 때까지 세워진 것 중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가 7-20km인 이중으로 된 성벽이 도시를 둘러쌌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2세의 명성을 고대 세계에 널리 떨칠 대규모의 아름다운 정원을 더했다.
명성과 기록
대부분의 학자들은 식량 생산이 아니라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 공중 정원을 만들었으며, 공중 정원에 대한 아이디어가 파라다이스로 알려졌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부터 즐거움을 위해 정원을 만드는 것이 고대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부자들은 최소한 각자의 집에 개인 정원을 가꾸었다. 정원에 꽃과 식물만 심은 것이 아니라 건축물, 조각상, 분수대가 더해지면서 고대 정원사들은 경관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폼페이 같은 곳의 프레스코 화가들이 방 안에 들어설 때 정원에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장면을 저택 벽 전체에 그릴 정도로 정원은 모두가 원하는 특징이 되었다. 이 정원들은 모두 고대 메소포타이마, 특히 바빌론의 아름다운 공중 정원을 모방했다.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9세기에 광범위하게 바빌론을 재건했다고 여긴, 전설적이며 신성한 아시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세미라미스의 공중 정원으로 불렸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인상적인 바빌론의 관개 시설과 성벽에 대해 설명했지만, 공중 정원에 대해서는 특정하게 언급하지는 않는다.(기자에 대한 설명에서 대 스핑크스 역시 이상하게도 누락되었다) 고대 문헌에서 공중 정원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그리스 섬에서 이주한 바빌론의 벨 우스루라고 불린 사제이자 코스 출신인 베로수스가 기록한 것이다. 베로수스가 기원전 290년에 쓴 공중 정원에 대한 글은 후대 작가들의 글에서 인용된 것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하지만 바빌론에 대해 그가 기록한 상당 수는 고고학적으로 검증되었다.
베로수스는 공중 정원이 산을 모방해서 만들어졌고, 거대한 나무와 꽃들이 다양하게 심어진 벽돌로 된 높은 테라스라고 묘사한다. 공중 정원은 초목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물을 끌어올리기 쉽게 지어졌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왕비이자 메디아 출신인 아미티스의 향수병을 치유하기 위해 고향의 초목과 언덕을 모방해서 정원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왕비가 없다.
다른 몇 가지 출처에는 공중 정원이 기원전 4세기에도 존재했었던 것처럼 나와있다. 하지만 모두 느부갓네살 2세의 통치가 수 세기 지난 후에 기록되었고, 바빌론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고 원예나 공학을 잘 모르는 작가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BC64 - AD24)는 공중 정원이 고대 바빌론에 흐르던 유프라테스 강 옆에 있었고, 정원에 물을 대기 위해 강에서 물을 끌려올리는 복잡한 기술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각 층에 오르기 위해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기원전 1세기에 공중 정원에 대해 기록한 그리스의 역사학자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공중 정원이 고대 극장처럼 경사졌으며, 높이가 20m에 달했다고 언급한다. 그는 공중 정원이 기둥 위에 지어졌고 갈대와 벽돌이 줄을 지어 늘어서있었다고 묘사한다.
메소포타미아식 정원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정원이 바빌론의 공중 정원보다 먼저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는 니느웨의 아슈르바니팔의 북쪽 궁에서 발견된 부조판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정원이 묘사되어 있다. 사실 몇몇 학자들은 바빌로니아 공중 정원에 대한 이야기는 출처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며, 실제 공중 정원이 있던 곳은 산헤립(BC 705-681)이 건립한 니느웨라고 주장한다. 니느웨의 정원과 관련한 문서와 고고학적 증거가 충분히 많고, 심지어 니느웨는 종종 ‘옛 바빌론’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니느웨에 관한 가설이 받아들여지더라도 바빌론에 공중 정원이 존재했다는 가능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시기 이후에 고레스 대왕(BC 530년)이 자그로스 산맥의 파사르가대에 만든 것과 같은 정원들도 있다. 그 정원들에는 관개 시설을 두기 위한 테라스와 그늘을 드리우는 벽이 있었고, 수분을 유지하고 고온의 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물이 풍부한 곳 근처에 있었다. (고대 중국부터 메소아메리카에 이르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궁전과 연관된 정원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공중 정원이 유프라테스 강 가의 느부갓네살 왕궁 중 하나의 근처에 있었거나 궁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도처에서 온 방문객들은 몇몇 고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건축적 야망, 거대한 규모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고대 건축물들은 고대 여행자와 순례객들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헤로도토스, 키레네의 칼리마코스, 시돈의 안티파테르, 비잔티움의 빌로 등 고대 작가들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곳 광경이라고 명단을 작성한 이후 7개의 건축물은 오리지널 ‘버킷 리스트’가 되었다. 스트라보가 길이 7km, 두께 10m, 높이 20m에 달한다고 기록한 묘사한 바빌론의 웅장한 성벽과 함께 공중정원은 고대 불가사의에 대한 초기 목록에 자주 올랐으며, 간간이 성벽보다 더 높은 탑이라고 설명되었다. 저자 P. 조던은 공중 정원이 ‘순전히 호화로움과 로맨틱한 마음의 역설을 표현’했기 때문에 7대 불가사의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느부갓네살 2세 이후, 아케메네스(BC 550-330)와 셀레우코스 제국(BC 312-63)의 통치자들은 종종 바빌론의 궁에 머물렀다. 덕분에 바빌론은 계속해서 두 국가의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바빌론은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사산 왕조에 차례로 정복되었지만, 그 지역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공중 정원은 지어진 후 몇 세기 동안 완벽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1899년에 고대 바빌론에서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중 벽과 이슈타르의 문과 같은 고대 구조물이 발견되었지만, 전설적인 정원의 흔적은 없었다. 바빌론의 남쪽 궁을 발굴하던 중 돔으로 된 방 14개가 발견되었으나, 나중에 그 지점에 발견된 명판을 판독한 결과 창고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강에서 더 가까운 곳과 왕의 궁전에서 다른 곳을 발굴한 결과 거대한 배수관, 벽, 저장고, 정원을 위한 관개 시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전설 속의 공중 정원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주는 증거는 아니었다.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공중 정원이 지어졌거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바빌로니아의 유물은 없다. 심지어 유적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이 점이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 존재했었다는 강력한 증거일 수도 있다. 전해지는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느부갓네살 2세의 업적과 바빌론으로 명명된 거리의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이 포괄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문서로 된 증거가 부족하지만, 고대 작가들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대 불가사의의 명단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공중 정원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워 보인다. 공중 정원이 니느웨에 있었다는 가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늘 그랬듯이 가능성이 높은 위치는 바빌론과 니느웨 중간 어딘가로 추정된다. 고대 불가사의의 원본은 그리스나 헬레니즘 시대에 작성되었다. 그리고 올리브 나무들이 있는 마른 계단식 언덕에 익숙한 그리스인들에게 이라크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기후에서 진기하고 기발한 관개 시설을 갖춘 공중 정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있었을까? 바빌론에 몇 가지 종류의 정원이 있었는데, 그리스의 이전 세대 기록에서 미로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처럼 그 규모가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고고학적으로 천천히, 고된 조사가 계속되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경의로움, 토론, 경쟁을 자극하는 인류의 위대한 노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리스트이자, 7대 불가사의에 대한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고 첫 번째로 보여주는 최고의 예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