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정의

Simon Duits
에 의해 , sun-young yang에 의해 번역됨
D}에 게시됨 09 Ju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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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ternion Eagle of the Holy Roman Empire (by Jost de Negker, Public Domain)
신성로마 제국의 사원수리 문장
Jost de Negker (Public Domain)

신성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962년부터 1806년까지 존속했다. 중세와 근세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지만, 통일 국가가 아니라 중소 정치집합체들의 연합이었다. 정치적 세력 기반은 불안정했고, 권력은 지속적으로 교체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정치집합체들이 연합할 때야 비로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제후국’들의 관심사는 자주 분열되었고, 서로 갈등을 겪었다. 다른 유럽의 왕들은 이들의 분열을 가차없이 이용했다. 결과적으로 권력이 약한 황제들은 신성로마제국보다 힘이 약한 국가의 왕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들은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으나, 권력 과시하고 유지하기 위해 항상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제국 선거단에 의해 선출되었다. 매번 선거가 진행될 때마다 권력을 향한 야망 있는 다른 가문에 황권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집권 왕조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투표를 해달라고 호소하며 선제후들과 협상을 해야 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황권이 약해졌고, 황제는 선제후들에게 제시할 것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 이는 새로운 왕조로 교체되는 시기에 종종 발생했던 것으로 결국에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

신성로마제국은 거대한 영토가 있었지만 강력한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만 강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권력이 약한 황제들은 선제후들에 의해 선출되는 군주제 아래에서 명목상 황제였을 뿐이고, 실질적인 권력은 가문 대대로 세습된 영토에 국한되었다.

제국의 기원

8세기부터 9세기에 프랑크족이 중서부 유럽에서 거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당일, 프랑크 족의 왕 샤를마뉴는 스스로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손자가 권력을 쥐었을 때 프랑크족의 영토는 빠르게 해체되면서 서프랑크(중세 프랑스의 전신), 중프랑크(로티링기아로 불리기도 함), 동프랑크로 삼분할 되었다. 후에 동프랑크 왕국은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에 독일 왕국이 되었다.

오토 1세의 즉위와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은 중프랑크에서 독일 왕국으로 옮겨졌다.

같은 하늘 아래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없기에 샤를마뉴의 손자는 중프랑크의 군주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롤링거 왕조의 대가 끊기면서 이 합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중프랑크가 부르군트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중프랑크는 혼돈에 빠졌다. 10세기에 이탈리아 왕국의 아델라이데 왕비(931-999)가 알프스 남부에서 벌어진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 왕국의 오토 1세(재위 936-973)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질서를 바로 잡고, 아델라이데와 결혼한 후 로마로 진군했다.

오토1세는 독일 왕국의 왕이자 아델라이드 가문의 일원으로서 이탈리아 왕국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로서 오토 1세는 황제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교황은 오토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와 이탈리아 왕국이 안정을 되찾은 것에 고마워하며, 그를 공석인 황제 자리에 앉혔다. 이 때부터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이 중프랑크에서 동프랑크와 독일 왕국으로, 그 후에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962년 오토1세의 황제 즉위가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일부 사학자들은 800년 샤를마뉴 대제의 즉위를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의 제국은 프랑크 왕국(혹은 카롤링거 왕국)에 국한된 것으로 전해진다.

Map of the Holy Roman Empire, 972-1032 CE
972년부터 1032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Sémhur (CC BY-SA)

오토 왕조 혹은 작센 왕조로 알려진 오토 왕가는 1024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다. 그들은 보헤미아 공작령을 제국에 편입했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오토 왕조는 잘리어 왕조로 교체되었다. 잘리어 왕조는 중프랑크,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해 신성로마제국으로 복속했다.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부르군트라는 주요 제후국으로 구성된 복합군주국이 되었다. 그동안 잘리어 왕조의 황제들은 서임권 투쟁으로 중세 교회와 갈등을 크게 겪었다. 11세기에 권력이 강해진 황제는 황제와 교황 중 누가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엄청난 토론과 유혈 사태 끝에 1122년 종교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보름스 협약 Concordat of Worms을 맺었다. 그 후에 집권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강력한 황권을 추구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황실이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절에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 규모에 도달했다. 13세기 권력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덴마크의 남부 경계부터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까지 통치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첫 번째 황제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5-1190)은 붉은 수염 때문에 ‘붉은 수염왕 Barbarosa’으로 불렸다. 황제로 즉위하기 전, 2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나이에 부를 축적했다. 대관식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서 상업 공화국들이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독일 왕국의 중앙집권적 통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산업 공화국들에 맞서 6번의 원정에 나섰다. 결국 교황,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비잔틴 제국까지 포함하는 도시들이 연합해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패한 후 비통에 잠겨 되돌아갔다.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다시 원정을 준비했으나, 레반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이슬람 술탄 살라딘(재위 1174-1193)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신성한 도시 예루살렘 재탈환을 목표로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꽤 멀리 진군했으나, 현재 터키 땅인 살레프 강에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Fredrick I Barbarossa Flanked by His Sons
두 아들을 옆에 세운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Unknown Artist (Copyright, fair use)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재위1220-1250)는 뛰어난 학식으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람 stupor mundi‘이라고 불렸다. 그는 6개 국어를 했으며, 시칠리아 팔레르모 궁으로 이슬람과 유대인 학자들을 초빙해 시, 철학, 중세 문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영토에 대한 끝없는 야망과 더불어 종교적 인내로 교황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세 번이나 파문됐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심지어 그를 적그리스도로 칭하며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스스로를 기독교적 귀감으로 여겼으며, 6차 십자군에 합류해 신성한 땅, 이스라엘로 진군했다.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십자군의 주장과 반대로 그는 술탄 알카밀(재위1218-1238)과 협상을 하여 예루살렘을 수복했다. 3차 십자군이 군사력으로 패배한 곳에서, 6차 십자군은 외교력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지방 귀족 혹은 통치자들이 중앙집권권력에 반발했던 것은 신성로마제국에 지속적인 골칫거리였다. 이 문제는 프리드리히 2세가 강압적으로 제압하며 일시적으로 잠잠해졌다. 하지만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면서 호엔슈타우펜 시대가 막을 내리자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한자 동맹에 소속된 북부 도시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공화국들과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으로 발생한 권력 공백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확장했다. 내륙의 봉건 군주들 사이에서는 황제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지만 그 어느 쪽도 황좌를 차지할 수 없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막을 내린지 60년이 지난 131년에 비로소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이 기간은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Interregnum)로 알려졌으며, 통치 공백 간의 사이(between regime)를 의미한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 문화와 경제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 중앙집권화가 약화됨에 따라 중세 후반부터 현대 초기까지 고대 봉건귀족에서 도시의 중산층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분권화가 시작됐다. 경제 시스템에서 돈이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비교해 토지 소유의 가치가 점차 빛을 잃었다. 이런 권력의 전환은 황제가 민주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황제를 선출하는 제국 선거단은 여전히 봉건 군주로만 구성되었다. 이들 중 개신교도들은 마인츠, 드리어, 쾰른의 대주교들이었다. 세속 선출자들은 독일 왕국의 공작인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의 공작들이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공작의 자리는 보헤미아 왕, 팔라티노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 바뀌었다. 제국 선거단과 다른 귀족들은 중세 후반기에 신성로마제국에서 지속적으로 거대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도시들이 부를 축적함에 따라 시민들은 봉건 영주들에게서 지속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얻어 내려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초기 근대화로 나가는 토대가 되었으며, 점점 도시화 되었다.

Medieval Army Approaching a City Under Siege
포위된 도시로 진격하는 중세 군대
Mohawk Games (Copyright)

이것은 이탈리아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됐던 봉건제에서 중상주의 경제로 전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베니스, 제노바, 피사 등 해양 도시들은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통치 아래에서 상당히 많은 자치권을 쌓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중앙 집권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해양 도시들은 더 많은 자치권을 얻어냈다. 피렌체와 밀라노가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결과적으로 르네상스로 나아가는 궤도에 올라섰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후기에 이들은 분명한 정치적, 경제적 위치에 더해 정신적, 문화적으로 제국 북부 주민들과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튜턴족’ 혹은 ‘게르만족’으로 칭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봉건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특권을 획득했다.

그동안 알프스 북부의 도시들은 더 많은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공작, 백작과 협상을 벌였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대립한 결과, 대체적으로 해당 도시에 아주 유리하게 작성된 ‘특권 Previleges’으로 불리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시민 계층은 점점 더 많은 봉건 영주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했다. 도시 안에서는 수공업자들이 자체적으로 중세 길드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곧 그들만의 정치적 조직이 되었다. 길드는 해당 지역의 노동시장, 생산량, 무역 관세 등을 통제했다. 더 나아가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봉건 귀족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와 특권을 얻어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연맹인 롬바르디아 동맹은 프리드리히 1세의 편에 섰다. 그리고 북쪽, 북해와 발트해의 상업 중심지였던 함부르크, 브레멘, 그단스크 등은 한자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조합에 합류했다. 12세기에 이미 도시들의 연합은 런던에서 동맹 도시들에 대한 모든 통행세를 면제하도록 국왕을 압박할 정도가 되었다.

Salt Warehouses in Lubeck
뤼벡의 소금 창고
Jorge Franganillo (CC BY)

확실히 신성로마제국의 번영을 위해 강력한 황제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중세 후기에는 황권이 약해졌으며, 도시, 길드, 시민들은 자신의 지위 향상을 위해 서로 협력했다. 그 사이에 황제 자리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 넘어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15년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다.

종교개혁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던 시기에 신성로마제국은 가장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으며 암흑기를 거쳤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나, 제국 북부에서 마틴 루터가 공식적으로 교황과 결별하고 서유럽의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1517년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상당수의 도시들이 이 기회를 보고 가톨릭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발생한 구조적 변화를 이용하면서 즉각적이고 광분한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면서 종교 개혁을 지지했다. 북부, 슈투트가르트, 프랑크푸르트 등의 도시들이 개신교를 지지지하는 방어선 역할을 한 반면, 라인란트,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의 남부 대부분은 가톨릭의 편에 남았다.

Luther at the Diet of Worms
보름스 의회에 선 마틴 루터
Anton Werner (Public Domain)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재위1519-1556)는 발칸 반도에서 프랑크, 투르크(비잔틴 제국의 뒤를 이음)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제국의 영토는 아니리지만 합스부르크의 영향 아래에 있던 헝가리를 위협했다. 카를 5세는 이 모든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1555년, 지친 카를 5세는 개신교도들의 요구에 굴복해 퇴위했다. 황제는 자신의 영토 밖에서는 종교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이 때부터 작센 공작, 보헤미아의 왕 등 ‘연합 왕국’의 군주는 구교가 될지, 신교가 될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는 데 일정 부분 어려움이 생겼으나, 종교적 분열이 안정되면서 16세기 이후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황권의 쇠퇴는 권력 공백을 초래하면서 공개적으로 갈들이 벌어졌다.

여전히 개신교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보헤미아 왕국은 서서히 개신교로 전환했다. 당시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동시에 보헤미아의 왕을 겸했다. 1618년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의 왕(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는 유지됨)에서 퇴위시키고, 개신교도인 후보자들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재위 1619-1637)은 이를 불쾌해하면서 수치스럽게 여겼고, 복수를 위해 군사를 파병하면서 30년 전쟁으로 불리는 오랜 갈등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황제파는 곧 보헤미아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황제는 개신교도인 경쟁자를 없애고 다시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1555년 카를 5세가 서명한 합의로 카를 5세는 세습 받은 영토에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다른 영토는 간섭할 수 없었다. 17세기에 과열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개신교인 보헤미아의 일을 황제가 간섭하는 것은 합스부르크가 도를 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결과적으로 홀슈타인 공작(동시에 덴마크의 국왕)이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전했다. 결과적으로 홀슈타인 공작은 패했고, 합스부르크는 더욱 막강해진 영향력으로 다른 나라들을 위협했다. 덴마크의 반란 이후 스웨덴이 독일 북부에서 개신교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려 했다. 스웨덴 국왕은 수년 간 황제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고 대승을 거두었으나 1632년 전사하고 말았다.

모두가 합스부르크에 패배했기에, 항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확장을 방해하려고 했던 프랑스에게 직접 갈등에 관여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독일 영토 안에서 벌어졌고,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투는 갈등을 질질 끌며 황권을 약화시키고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개신교도인 귀족들과 덴마크, 스웨덴, 프랑크의 개입에 의한 내부 저항을 다루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이 충분치 않았다. 1648년 오랜 협상 끝에 광범위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은 재앙을 초래한 갈등이며, 유럽사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이며 재앙적인 충돌 중 하나를 종식시켰다. 마지막에는 종교적, 세속적으로 의미에서 평화가 신성로마제국에 되돌아왔다.

Map of the Holy Roman Empire, 1648 CE
1648년의 신성로마제국 영토
Astrokey44 (CC BY-SA)

제국의 쇠퇴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 이후 합스부르크는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유지했으나, 권력은 오스트레아, 보헤미아, 헝가리로 제한되었다. 1683년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비엔나에서 중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가 유럽의 거대 권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프랑스의 루이 16세(재위 1643-1715)가 동쪽 국경을 라인강까지 확장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 했다. 프랑스가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파리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 커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인 호엔촐레른 가문이 프러시아 왕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는 황제가 마지못해 승낙한 것이었지만, 프러시아는 1740년 합스부르크 영토 중 가장 부유하고 생산성이 높은 실레지아를 신속하게 공격했다. 합스부르크의 반격은 전반적으로 성공하지 못 했으며, 황제는 결국 살레지아를 프러시아에 통째로 넘겨야했다. 그 이후로도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19세기 첫 번째 독일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통일 전 신성로마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튈르리 궁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황제
Jacques-Louis David (Public Domain)

1800년 경, 신성로마제국의 서쪽 국경을 위협했던 프랑스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국가 형태를 갖추었다. 첫 번째 혁명군의 형태에서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페르소나가 된 프랑스는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두며 동쪽으로 진군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자기 영토 외에서는 더 이상의 권위를 갖지 못 하는 신성로마제국에 압도적인 패배로 치욕을 안겨줬다. 프랑스에 편입된 대부준의 독일 영토들이 라인강 연합이라고 불리는 위성 국가에 편입된 이듬 해 신성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배한 이후에도 연합의 개념은 유지되었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모든 독일 왕국의 국가는 새로운 독일 연방에 합류했다. 프로시아의 확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는 결국 독일 연방에 합류하는 것에서 제외되었다. 비엔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서 권력을 유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이 발발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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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기 정보

sun-young yang
학부 전공은 영문학과 경영학이고, 대학원에서 교육공학을 전공하였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유럽사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 중동 지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 소개

Simon Duits
사이먼 다위트는 네덜란드 사학자로 중세사를 전공했다. 더 많은 독자에게 광범위하고 어렵지만 언제나 흥미롭고 놀라운 중세 시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World History Encyclopedia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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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its, S. (2021, June 09).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 (s. yang, 번역기). World History Encyclopedia. 다음에서 검색됨 https://www.worldhistory.org/trans/ko/1-17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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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its, Simon. "신성로마제국." 번역자 sun-young yang. World History Encyclopedia. 마지막 수정 June 09, 2021. https://www.worldhistory.org/trans/ko/1-17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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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its, Simon. "신성로마제국." 번역자 sun-young yang. World History Encyclopedia. World History Encyclopedia, 09 Jun 2021. 웹. 03 Dec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