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는 고대 무역 경로의 네트워크다. 공식적으로는 기원전 130년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졌고 기원전 130년부터 기원후 1453년까지 무역을 위해 고대 지역들을 연결했다. ‘실크로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실크로드는 동서를 연결하는 한 개의 경로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실크경로’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유럽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했고, 자신의유명한 저서에서 실크로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그가 이름 붙인 것이라고 인정되지 않는다. 이 무역 경로의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두 가지 용어, ‘실크로드’와 ‘실크경로’는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새롭게 만든 용어이다. 그는 무역 경로의 네트워크를 'Seidenstrasse'(실크로드) 혹은 'Seidenstrassen'(실크경로)라고 이름 붙였다. 마르코 폴로와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실크로드를 따라 운송된 물품에 대해 언급하였다.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
- 말
- 말안장과 승마도구
- 포도덩굴과 포도
- 개와 이국적인 가축들
- 동물의 털과 가죽
- 꿀
- 과일
- 유리그릇
- 울담요, 양탄자, 카페트
- 커튼 등의 섬유
- 금과 은
- 낙타
- 노예
- 무기와 철갑옷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문물:
- 비단
- 차
- 염료
- 보석용 원석
- 본 차이나(접시, 둥근그릇, 컵, 꽃병)
- 도자기
- 향신료(계피, 생강 등)
- 구리와 금으로 만든 공예품
- 약재
- 향수
- 상아
- 쌀
- 제지기술
- 화약
한나라 (기원전202~기원후220)가 공식적으로 서역으로 향하는 무역을 개시한 기원전 130년부터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의 무역을 거부하고 실크로드를 폐쇄한 1453년까지 실크로드는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이 때까지 유럽인들은 중국에서 온 물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실크로드가 폐쇄되었을 때 상인들은 이런 물건들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무역 경로를 찾아야 했다.
실크로드가 폐쇄되자 유럽의 탐험가들이 육상 무역을 대체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서 해상 무역 경로를 찾았던 시기로 정의되는 대항해 시대(1453-1660,탐험의 시대로도 알려짐)가 시작되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신과 나라의 이름으로 몇몇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고, 다른 나라에 유럽의 문화와 종교를 전파하는 것으로 세계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다른 나라들도 유럽의 문화적 전통에 영향을 주었다. 개척되었을 때부터 폐쇄될 때까지, 실크로드 없이 현대 세계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실크로드는 세계 문명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길
실제로 실크로드의 역사는 한나라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실크로드의 주요 동맥 중 하나였던 페르시아의 왕의 길이 아케메네스 제국 (기원전 550-330) 시기에 만들어졌다. 왕의 길은 페르시아 제국이 북부(현재 이란)의 수사에서 소아시아(현재 터키)의 지중해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제국 전역에 왕명을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전령이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참이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령의 속도와 효율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페르시아의 전령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눈, 비, 더위, 밤의 어두움도 이 전령들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지정된 업무를 완수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역사 8권,98)
수 세기가 지난 후, 왕의 길은 미 연방우체국의 신조를 형성하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은 왕의 길을 신중하게 유지했고, 작은 도로들로 왕의 길을 확장하였다. 왕의 길은 최종적으로 인도아대륙,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이집트에 이르렀다.
중국과 유럽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기원전 339년 페르가나 분지 (현재 타지키스탄)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그 곳에 남겨두고 진격했다. 마케도니아 전사들은 현지인들과 결혼을 했으며, 알렉산더 대왕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 아래에서 번성했던 그리스-박트리아 문화를 창조했다.
에우티데모스 1세(재위 기원전260-195)의 통치 시기에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스트라보(기원후 62-24)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은 “세레스만큼이나 멀리 그들의 제국을 확장했다”(지리서 11권 2.). 세레스(Seres) 는 ‘비단이 유래된 동아시아 지역’이라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중국을 부르던 이름이다. 중국과 유럽 사이의 첫 번째 접촉은 기원전 200년 경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한 왕조는 북쪽과 서쪽 국경의 유목 민족인 흉노족으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았다. 기원전 138년 한나라 고조 유방은 흉노족 토벌을 위한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 월지족에게 장건을 특사로 파견했다.
장건은 원정길에 중앙 아시아의 여러 문화와 문명을 접했다. 그가 ‘대완’이라고 부른 ‘위대한 이오니아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남긴 후손, 그리스-박트리아인이었다. 대완인들에게는 튼튼한 말이 있었다. 장건은 한 고조 유방에게 대완의 말에 대해 보고하였고, 대완의 말들은 훗날 약탈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흉노족을 대항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장건의 원정으로 중국은 서쪽의 더 먼 지역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기갑부대를 꾸리기 위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말을 번식하는 방법이 방법이 전국적으로 전해졌다. 말은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졌었다. 상나라(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때부터 전쟁을 할 때 기마 부대와 전차 부대에서 말을 사용했지만 중국인들은 서역 말의 크기와 속력을 부러워했다. 한나라는 대완에서 온 서역 말을 타고 흉노족을 토벌했다. 흉노족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후 한고조 유방은 서역과의 무역으로 다른 것을 얻을 수 없을 지 생각하게 되었고, 실크로드는 기원전 130년에 개통되었다.
기원전 171년부터 138년에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 1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왕국을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벌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7세(재위 기원전138-129)는 미트리다테 1세의 왕국 확장에 대립했다. 또한 형제 데메트리오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미트리다테 1세의 후계자인 프라테스 2세의 파르티아 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안티오코스 7세의 패배로 메소포타미아는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실크로드의 통제권도 파르티아의 영향 아래에 놓였다. 그 때 부터 파르티아인들은 중국과 유럽 사이의 중개인이 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거래된 문물
다양한 물품이 실크로드의 무역 네트워크를 따라 전해지면서 중국산 비단의 인기에서 비롯된 명성이 서양, 특히 로마에 전해졌다.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인도, 소아시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지나 이집트, 아프리카 대륙, 그리스, 로마, 영국까지 뻗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현재 이란)은 파르티아 제국의 일부분으로서, 중요한 문화 교류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가장 가까운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한나라에서 발명한 종이, 역시 중국의 발명품인 화약은 비단보다 문화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가졌다. 중국의 풍부한 향신료 또한 비단 산업에서 시작된 패션보다 문화적으로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27- 기원후14 ) 시절에는 중국과 유럽 사이의 무역은 확고해졌고, 비단은 이집트, 그리스, 특히 로마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재화였다.
로마인들의 비단 사랑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정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기원전 83-30)와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30)가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기 위해 비단옷을 논쟁거리로 만들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 모두 중국산 비단을 좋아했고 중국산 비단은 갑자기 퇴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정적을 강력하게 비난하기 위해 비단과 퇴폐라는 연결고리를 이용하였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비단의 인기를 억제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 했다.
역사가 윌 듀란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나무에서 자라는 식물성 제품이라고 생각했고, 금의 무게만큼 가치있게 여겼다. 대부분의 비단은 코스 섬에서 생산되었고, 비단은 로마와 다른 도시의 여성들이 입을 드레스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기 91년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였던 메세니아는 여성들이 종교 시설에서 투명한 비단 드레스 입는 것을 금지했다. (329)
세네카(기원전 4 - 기원후 65)가 살았던 시기의 보수적인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보다 더 열정적으로 중국산 비단이 여자들에게는 부도덕한 의상이고, 남자들에게는 여자같은 옷이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비난도 로마와의 비단 무역을 멈추지 못 했고, 코스 섬은 비단 의류를 생산으로 부유하고 호화로워졌다.
듀란트의 기록에 의하면 “이탈리아는 파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쁘게 사들이면서 ‘불리한’ 균형을 즐겼다”하지만 여전히 “카페트, 보석, 호박, 금속, 염료, 약, 유리”와 같은 귀중한 물건을 중국으로 수출했다.(328-32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기원후 161-180)가 통치했던 시기까지 비단은 로마에서 가장 값나가는 상품이었고 보수적인 비판 여론이 많았지만 비단 무역을 둔화시키거나 유행을 멈출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 이후에 비단 가격이 급격히 올랐지만, 그 인기는 로마 제국이 기원후 476년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로마의 동쪽은 훗날 비잔틴 제국이 되었고, 비잔틴 제국에서도 로마의 비단 사랑이 계속 되었다. 기원후 60년, 유럽은 비단이 중국의 나무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누에고치에서 나온 명주실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의도적으로 비단 생산지를 비밀에 부쳤고, 생산지가 알려지자 누에고치와 비단 수확 과정을 철통같이 방어했다.
중국이 비단 가격을 과도하게 요구하자 이에 지친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기원후 527-565)는 신하 두 명을 수도사로 위장하게 한 후 중국에서 누에를 몰래 가져 오게 했다. 누에 밀반출은 성공했고, 비잔틴 제국의 비단 산업이 시작되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너지고, 오스만 제국이 실크로드의 고대 경로를 폐쇄하면서 유럽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차단했다.
실크 로드가 남긴 것
실크로드가 남긴 가장 위대한 가치는 문화의 교류이다. 상인들이 여러 나라로 물건을 팔며 돌아다니던 길을 따라 예술, 종교, 철학, 기술, 언어, 과학, 건축, 그리고 문명의 다양한 요소가 전해졌다. 실크로드를 따라 질병도 전파되었다. 542년에 발병한 흑사병은 실크로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전해졌다고 추측되며,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죽은 것이 밝혀졌다.
실크로드가 폐쇄됨에 따라 상인들은 무역을 위한 정기적인 경로를 찾기 위해 바다로 나가야 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인 상호작용과 광범위한 공동체가 시작되는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실크로드는 세계에 대한 그 당시사람들의 이해를 넓혔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폐쇄로 유럽인들은 바다를 건너 탐험하고 소위 아메리카 대륙의 신세계라고 불린 곳을 정복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교환이라고 불린 구대륙과 신대륙의 물건과 값나가는 것들이 교환되는 소위 콜럼버스 교환이 시작되었다. 신세계의 토착민들에게 전 세계적으로 손상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실크로드는 현대 세계가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